억류 장기화 문턱서 숨 고르기…이란, 관계악화 부담된 듯

이란 정부가 한 달 가까이 억류 중인 우리 국적 선박 ‘한국케미호’ 선원들을 석방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세이에드 압바스 아락치 이란 외교부 차관은 지난 2일 저녁(한국시간) 최종건 외교부 1차관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 같은 방침을 통보해왔다고 외교부는 밝혔다.

약 30분간 이뤄진 통화에서 아락치 차관은 선원 20명 가운데 한국인 선장을 제외한 우리 국적 선원 4명 등 19명을 우선 석방하겠다고 했다.

최 차관은 이번 결정을 환영하면서도 선장과 선박도 조속히 억류 해제될 수 있도록 이란 측이 최선의 노력을 다해줄 것을 촉구했다.

이란 정부는 선장과 선박에 대한 조치는 사법절차가 마무리된 뒤 결정한다는 방침이며, 그 기간 동안 인도적 처우와 충분한 영사조력 보장을 약속했다.

한국케미호와 선원들은 지난달 4일 걸프 해역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에 나포돼 이란 남부 반다르아바스 항에 3일 현재 30일째 억류 중이다.

이란 당국은 선박 억류 이유에 대해 해양 오염 행위를 들었지만 아직까지도 증거 자료는 제출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이란 측이 한국 내에 묶여있는 원유수출대금(70억 달러) 문제를 풀기 위해 한국케미호를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물론 이란 측은 선박 억류는 ‘기술적 사안’이며 한국 내 동결자금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라는 공식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하지만 최근 모즈타바 졸누리 이란 국회 국가안보·외교정책위원장이 동결자금 해제가 선박 억류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히는 등 간접적으로 속내를 드러내왔다.

이런 가운데 이란 정부가 선장을 제외한 선원들이라도 먼저 석방하기로 한 것은 억류 사태가 장기화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정도의 사안으로 한 달 넘게 민간 선박 선원들을 억류하는 것은 국제여론 상으로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일이고, 한국민의 감정을 자극해 양국관계의 심각한 훼손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어찌 됐든 동결자금 문제를 풀기 위해 한국과 협조가 필요한 이란으로서는 적당한 선에서 속도 조절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이란 스스로 억류선박과 동결자금의 분리 대응을 강조해온 만큼 일단 쉬운 문제부터 푸는 것은 합리적 수순이었다.

이란 국기. 연합뉴스이란은 지난 2019년 7월에도 영국 유조선을 억류 두 달 만에 풀어줬고 2013년 8월에는 인도 선박을 25일 만에 석방한 사례가 있다.

이들 사건은 상대국의 자국 선박 억류 등에 대한 보복 성격이어서 협상은 오히려 쉬운 측면이 있었다.

반면 한국케미호 문제는 미국의 재가가 필요한 한국 내 동결자산 해제와 사실상 연동돼있다는 점에서 해결 전망이 불투명했다.

하지만 결국 이란은 선장을 제외한 선원 석방으로 부담은 덜면서도 선장과 선박은 계속 협상 지렛대로 활용하는 절충안을 택했다.

한국 정부도 억류 한 달째를 앞두고 ‘무능 외교’ 비판을 받기 직전 가까스로 한숨을 돌린 채 미국과 협의할 나름의 여유를 갖게 됐다.

양국 차관은 이번 결정을 계기로 한-이란 신뢰 회복의 중요한 첫걸음이 시작됐다고 평가하고 동결자금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협력하기도 했다.

최 차관은 특히 동결자금과 관련, 우리 정부가 독자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속도감 있게 추진하되 미국과의 협의가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투명하게 진행할 것이란 방침을 이란 측에 전달했다.

그러나 미국은 바이든 정부 출범으로 이란 핵협정(JCPOA)을 비롯한 대이란 정책 전반을 재검토하는 중이어서 적어도 당분간은 한국과 긴밀히 협의할 여유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JCPOA 복원 문제만 하더라도 미국은 중동 안보 상황 변화를 이유로 이란에 추가협상을 요구하는 반면 이란은 강력 반발하는 등 낙관하기 힘든 상황이다.